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21 사태 (문단 편집) == 개요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kimshinjouniform.jpg|width=100%]]}}} || || {{{#fff '''124 부대 복장'''}}} || 종로 경찰박물관에 전시된 124부대의 당시 복장이다. 군모에 대한민국 국군 대위 계급장을 달아 한국 육군으로 위장 시도를 했다.[* 1.21 사태의 관련 기록들 중 대다수가 이 복장을 "국군 복장", "국방색 국군 군복" 등으로 칭하는 이유는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war&no=385429|1950년대~1960년대 한국군 군복]] 중에 저 복장과 같은 [[카키]]색 군복이 실존'''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군사지식에 관심이 없는 많은 일반인들은 올리브색뿐만 아니라 카키색도 그냥 국방색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그걸 생각해 보면 왜 저 군복이 "국방색" 군복이라고 불렸는지 이해할 수 있다.] 자세히 보면 [[네일배트|방망이에 못이 빼곡히 박혀 있는데]] 청와대에 진입할 때 청와대 경비병력을 조용히 제압하기 위해 가져왔다고 한다.[* 나중에 채널 A의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서 김신조가 직접 밝힌 바에 의하면 해당 무장은 전원이 소지하지 않았으며 이 방망이를 소지한 사람은 단 두 명이었다고 한다. 즉, 맨 선두에 선 2명의 공비가 갖고 보초 병력을 때려눕히기 위해 손목의 고리에 미리부터 휴대하고 있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tH2qLlvAVsE)]}}} || || {{{#fff '''대한뉴스 <서울로 침투한 무장간첩 사살 및 북한의 만행> 보도'''}}}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HZvuFcSG090)]}}} || || {{{#fff '''<대한뉴스 제 863호>'''}}} || [[1968년]] [[1월 21일]] [[북한]] 민족보위성[* 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성]]] [[정찰총국|정찰국]] 소속 [[공작원]](124부대)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여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청와대로부터 300m 떨어져있는 종로구 세검정 고개[*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영동(종로구)|신영동]] 세검정 즈음에 있던 [[고개]]. 현재의 자하문 고개로 사건을 언급한 비석과 사망자의 동상이 있다.]까지 침투하였던 사건이다. 총 침투한 31명 중 사살 29명[* 조장은 김종웅으로, 종로경찰서장 최규식에게 기관단총을 쏘면서 교전의 시작을 알렸다. 김춘식이라는 공비 1명도 생포되었으나 치안국으로 압송하는 과정에서 무장해제 도중 [[수류탄]] 핀이 뽑혀 폭발하여 사망했다. 이 과정에서 대한민국 측 피해는 없었고 사살로 포함한다.], 미확인 1명[* [[박재경(북한)|박재경]]으로 알려져 있으며 제1보병사단 15연대장 이익수 대령을 사살하고 나서 북한으로 도망쳤다. 이후 인민무력부 부부장을 역임하다가 은퇴 후 명예직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투항 1명([[김신조]] 소위)[* 대한민국 국군에 투항해 협조했다. 총을 쏘지 않았다는 점이 밝혀져 풀려났고 김재현으로 [[개명]]했다. [[서울성락교회]] 목사로 일하다가 목회직에서 은퇴했다.]의 전과를 올렸다. [[마지막 생존자|유일한 생존자]]인 [[김신조]]의 이름을 따서 이 사건을 일명 '김신조 사건'이라고도 한다. [[김신조]]는 이튿날의 기자회견에서 침투 목적을 묻는 기자에게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https://youtu.be/PFm2lPh1_0E&t=103s|#]]라고 밝혀 온 국민을 경악하게 만들기도 했다. 원래 북한에서 최초로 세운 작전은 세 자리 숫자의 병력을 침투시켜서 본대는 청와대를 기습해서 박정희를 암살하고 나머지는 각 조별로 [[주한미국대사관|미 대사관]] 공격 및 요인 암살,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 공격 및 요인 암살, [[교도소]] 공격 후 죄수 석방 등 서울 시내에 총체적인 대혼란을 유도하고 석방시킨 죄수와 공격조가 동반 [[월북]] 후에 [[삐라]]를 뿌려서 '''남조선 내 반정부 세력의 의거'''로 꾸민다는 대규모 계획이었다고 한다. 한 마디로 9일 뒤인 1월 30일에 베트남에서 일어난 [[구정 공세|테트 대공세]]와 같은 작전을 노린다는 것이다.[* 실제로 동년 10월에 후방에 유격전 근거지(해방구)를 만든답시고 울진, 삼척 지역에 100여 명 규모의 대규모 게릴라를 침투시켰다.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문서 참조.] 그러나 여러 가지 현실적인 이유로 작전을 축소해 30여 명을 침투시켜서 청와대를 습격하는 것으로 최종 결정이 난 것이다. 침투·습격·탈출조 등 3개조로 나누어 침투조가 청와대 보초를 제거하고 경계를 펴는 동안 습격조는 청와대 내부를 공격하고 철수하면 탈출조는 청와대 경내의 차량을 탈취해 시동을 걸어 놓고 있다가 임무를 마친 동료들을 싣고 문산 쪽으로 도주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이 모든 일을 고작 3∼4분 만에 끝낼 계획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김신조는 원래 교도소 공격조였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